창세기 M 61

계시가 부족하기 때문에 은혜를 바깥에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은혜는 신성한 위격(a divine person) 이다.
은혜는 그 영으로 우리 영 안에 거하시는 삼일 하나님의 신성한 인격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의 누림 안으로 이끄시려 한다.
그 장애물은 자아이다.
풍성한 은혜를 누리려면 우리는 다루어지고 할례받고 잘려져야 한다 (천연적인사람, 자아 이기심 체면 등등).

아브라함의 할례 후에 이삭이 왔다.
자아가 없어졌을 때 이삭이 온다.
이것은 은혜가 온다는 뜻이다.

이삭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아브라함의 모든 소극적인 체험들은 이삭의 적극적인 누림을 위한 것이었다.
상실의 방면에서 나는 아브라함이고,
얻는 방면에서 나는 이삭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는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어떤 것이며,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어떤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를 위해 일을 하고 살고 역사하기 위해서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온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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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 은혜, 할례, 누림, 신성, 위격, 교회

창세기 M 60

아브라함은 선했지만 온전하지 않았다.
사라가 죽은 후 그는 그두라와 다시 재혼했다(아들 여섯명).
그는 육을 더 많은 이스마엘들을 낳기 위해 사용했다.

아브라함은 혼자 온전할 수 없으므로 야곱과 이삭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삶에 이삭과 야곱의 삶을 더한 삶, 이 세방면이 필요함을 모두가 보게 되기 바란다.

생명의 성숙의 표시는 축복이다.
야곱은 빼앗는자, 발 뒤꿈치를 잡는 자로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왕자(a prince of Got), 이스라엘로 변화되었다.

생명 안에서 성숙한 야곱은 빼앗던 손이 축복하는 손이 되었고, 불신자이며 이방 왕인 바로를 축복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그는 축복밖에 하지 않았다.

어떤 성도들은 봉사자나 교회들에 대해 불평한다. 불평하는 것은 미성숙의 표시이다.
성숙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고, 축복할 것이다. 성장하면 할수록 더욱 축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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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성도, 봉사, 교회, 축복, 성장

창세기 M 59

주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을 뿐만 아니라, 신부를 얻기 위해 오셨다.
신약 전체는 아들의 신부인 배필을 위해 인류의 한 부분을 얻으려고 함께 일하는 삼일 하나님의 기록이다.

그리스도의 배필은 천사들이나 다른 피조물에서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의 족속"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성육신되신 후로, 인류는 그분의 족속이 되어 왔다.
인류는 그리스도의 족속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인류의 한 부분으로서 오직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배필이 될 자격이 있다!

창 24장은 "그러므로 이삭은 자기 어머니를 잃은 후에 위로를 얻었다."라는 말로 끝난다.
우리의 위로나 만족을 생각지 말고 그리스도의 위로을 생각하라.
그리스도가 위안과 만족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도 어떤 위안이나 만족을 가질 수 없다.
우리의 만족은 그분의 만족에 달려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위로를 기다리고 계신다.
언제 그분이 위로를 갖는가? 그분이 신부를 얻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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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58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활을 닮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사흘 밤낮을 기도하고 금식하고 몇년동안 이렇게 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음을 솔직히 말하겠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임재 안에서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금식하거나 기도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행했기 때문에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것이었다.

굳이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하나님과 하나된 생활이 필요하다.
주님과 하나 안에서 생활할 때 우리는 주님의 생각을 공유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느낌을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살았던 환경이 주님 자신임을 알 수 있다.

리브가는 순결하고 순수했으며 또한 친절하고 부지런했다

리브가는 또한 순종하였다.
그녀는 이삭임을 깨닫고 "면박을 취하고 스스로 가리웠다"
면박은 순종을 표시한다.

당신이 결혼하면 더이상 머리가 아니다.
당신 남편이 머리이며 당신의 머리는 가리워져야 한다.
이것이 결혼의 참 의미이다.

이삭의 결혼은 결국 한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였습니다 (21:12, 22:17-18).
24장에서의 사람들의 생활은 다만 그들 자신의 인간생활이 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생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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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57

땅 위에서의 우리의 일시적인 삶은 나그네의 생활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거처에는 전혀 관심하지 않았고
오직 장막만 지었다.
그는 나그네, 즉 여행자였다.
그는 마치 며칠 동안 산에 캠핑하러 가는 사람처럼 그의 장막을 쳤다.
참 야영자였던 아브라함은 전 생애 동안 야영했었다.
그는 장막에는 많이 관심하지 않았지만 무덤에 대해서는 매우 마음을 썼다.

사라가 죽었을 때 하나님과 교통의 장소인 헤브론에 묻혔다.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은 밭의 끝에 있었다.
밭은 생명의 성장, 즉 부활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죽음의 장소에 두지 않고
완전한 부활의 장소, 생명의 장소에 두었다.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은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출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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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56

이삭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아브라함은 번제물에 사용할 나무를 취하고 그것을 이삭에게 지웠다 이삭은 나무를 모리아 산 꼭대기까지 지고 올라갔다"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 산까지 걸어갔을 뿐 아니라 나무를 지는 것과 묶이는 것에 순종하였다.
아버지가 제단에 놓고 칼을 들어 그를 죽이려고 손을 뻗쳤을 때까지도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즉 골고다로 가시기 전에 이삭이 번제물에 사용할 나무를 지고 그 길을 걸어갔다.
또한 예수님은 이삭이 제단에 올려졌던 그 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삭은 하나님의 독생자(예수)를 예표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 한 명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다시 그를 드렸다.
그런 후 이 이삭 한 명이 수많은 별들과 모래로 증가하였다.
만일 이삭을 다시 드리려 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오직 이삭 한 명뿐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이삭을 드렸기 때문에 이삭은 새 예루살렘으로 증가되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이것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증가시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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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55

22장은 21장과 바로 이어진 장이다.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른 것을 언급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오셨다.
사탄과 달리 하나님은 결코 어느 누구도 유혹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시험하신다.

결국 모리아 산은 좋은 땅의 중심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 산에 매년 세 번씩 하나님께 번제물을 드리기 위해 올라가야 했다(신 16 :16, 시 132:13).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선택한 장소로 가야 한다.

사냥꾼이며 활 쏘는 자인 이스마엘은 애굽 남쪽으로 가서 애굽 여자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번제물인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모리아로 올라갔다.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 활 쏘는 자와 번제물의 그림을 본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는 로마서 4장 17절은 그가 믿은 하나님을『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두 가지에 대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본다.
그것은 부활의 하나님과 창조주 하나님이다.
이삭의 출생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과 관계 있었고 그를 돌려주신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과 관계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런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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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54

창세기 21장에 따르면, 이삭의 출생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성장이 문제를 일으켰다. 이삭이 자란 뒤에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하기 시작했다(9절).
이것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다는 의미이다. 이스마엘이 조롱한 것은 심각했다.
왜냐하면 이삭은 하나님이 정하신 씨였고 이스마엘은 모조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조품은 항상 정해진 자를 미워한다(갈 4:29).

이삭을 위한 우물(22-34절)은 복락의 강수이다(시36:8).
주님은 우리가 복락의 강수를 마시기 원하신다.
요 4장 14절에서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원천이 되어 샘솟아 올라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고 말씀하셨다.
계 22장 17절에서도 “그 영과 신부가 말씀하십니다. .... 원하는 사람은 다 생명수를 거저 받아 가십시오.“라고 하셨다. 이 신성한 우물이 우리의 삶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창 21:33절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한다.
21장에서 우리는 ’엘 오람(영원하신 하나님)‘을 본다.
17장에서 우리는 엘샤다이(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를 보았다.
아브라함은 비밀하고 신비로운 분인 하나님을 체험했다.
우리는 그분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다(시 90:2, 사 40:28).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머무르는 동안 여호와 엘오람을 부름으로써 살았고, 영원하고 숨겨진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함으로써 살았다.
그는 우물의 풍성을 표현하는 흐르는 생명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는 에셀나무가 우리에 의해 체험된 생명나무임을 말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생명나무의 표현이다.
이 나무는 여호와 엘오람이시다.

아브라함에게서 두 종류의 백성이 나왔다.
한 부류는 광야에서 살고 애굽과 연합한 이스마엘로 대표되고, 다른 한 부류는 브엘세바에서 살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던 이삭으로 대표된다.

오늘날에도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한 부류는 이스마엘같이 광야에서 살고 세상과 연합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이삭과 같이 그들의 영 안에서, 교회 안에서 살고 시온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자신을 위해 살고 세상과 연합하여 산다면 이스마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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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53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고, 그의 삶은 믿음의 삶이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할 수 있었던 놀라운 성도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을 가진 후 일년도 안되어 헤브론을 떠나 남쪽으로 여행했다.
북쪽은 하나님의 임재와 고난이 있다.
남쪽에는 편안함은 있으나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옛창조 안에 있기 때문에 다시 타락하고 실패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실패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위치를 고수함으로써 아비멜렉을 위해 중재기도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중재하는 것이 우리가 승리한 상태에 달려있지 않고, 우리의 위치에 달려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자, 새 피조물,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할 수 있는 위치를 우리에게 준다.
우리의 환경과 실패를 잊어버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 남쪽으로 여행한 후, 지난 실패를 반복하여 그의 아내를 희생시키는 거짓말을 했다(20:2, 12:11-13 비교).
나는 사라를 보고 감탄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거짓말하는 데 불평하지 않고 동의했다.

예표론을 볼 때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을 나타내고 사라는 은혜를 나타낸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남편은 항상 믿음을 나타내고 아내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고 그의 삶은 믿음의 삶이었다.
사라가 하나님의 은혜를 예표하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난 이삭은 그가 은혜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해졌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주권적인 돌보심으로 그를 보호하셨다(3절-7절, 14절-16절).
18장과 19장에서, 하나님은 롯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여기 20장에서,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아비멜렉의 꿈 속에 나타나셨다(3절).
이 점에서 볼 때, 20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위치는 19장에서의 롯의 위치와 거의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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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52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의 가족과 롯의 가족은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은 나뉘어졌다.
롯이 뿌린 분열은 이스라엘의 분열로 발전되었다.

북쪽 왕국은 인수가 많았어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합당한 위치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하나였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을 떠나서 많은 교파들이 생겨났다.
그러한 분열은 주님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간증은 헤브론에 있는 아브라함의 장막에 있었으며 소돔 성에 있는 롯에게 있지 않았다. 18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두 천사가 아브라함과 함께 음식을 먹고 친밀한 교통을 누린 것을 본다. 그러나 천사들이 소돔성으로 갔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임재는 아브라함의 가족에게 있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추구한 모압인 과부 룻은 보아스와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총회 안에 들어왔으며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다. 결국 그녀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족보 안으로 들어왔다(마 1:1, 5).
이것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긍휼이다.

하나님의 백성 중 하나인 롯과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간증을 떠났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을 낳았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추구한 모압인 과부 룻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간증으로 돌아왔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족속과의 음행을 엄중히 심판하셨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 23:3-6)고 선포하심으로써 거룩하고 신성한 분노로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을 거절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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