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M 31

노아는 새 땅 위의 지도자요 온 땅 위의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었다.
노아는 농부가 되어 포도원을 경작하여 성공함으로 좀 느슨해졌을 뿐 아니라 부주의 함으로 벌거벗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실패의 면에서 노아를 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통치면에서 그 상황을 보아야 한다.
노아의 벌거벗음을 드러낸 함은 하나님이 통치를 무시했다.
함은 저주 받았다.

노아는 인도자였으며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 권위였다.
인도자의 실패를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을 말한 미리암은 문둥병의 저주를 받았다.

우주적인 통치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이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려 반역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자가 옳으냐? 그르냐? 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왜 함이 저주받았는가?
그가 하나님의 권위에 손을 대었고 하나님의 통치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인도자의 실패는 우리에게 하나의 시험이 된다.

노아의 실패는 그의 아들들에게 하나의 시험이었다.
동일한 시험으로부터 한 명은 저주를 받았고 두 명은 축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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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30

방주는 그리스도의 예표요,
홍수를 통과한 것은 침례의 예표이다.
아라랏 산에 머물렀던 방주는 사망의 물로부터 나온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

방주 안의 여덟사람들은 신약의 믿는이들을 나타내는데,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그분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우리들은 부활한 사람들이다!

만물은 타락한 사람의 권위 아래 있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라,
부활한 사람의 권위 아래 있도록 정해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대표할 수 있도록 통치권을 맡기셨다.
이제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며 살아있을 뿐 아니라, 모든 상황을 다스린다!

방주에서 나와서 그들이 한 첫번째 일은 재단을 건축하고 희생을 드린 것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체험한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리려면, 우리는 모두 제단에서 없어져야 한다.
십자가로 가서 우리 자신은 그곳에서 없어져야 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한 후 오직 그리스도만 남게 될 것이다.

평강! 기쁨! 사랑! 불쌍히 여김! 친절함! 정상적인 생활!
이 모든 것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 얻은 생명의 축복들의 표시이다.

그러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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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29

<하나님의완전한구원의 두 방면>
*피를 통한 주님의 구원
*물을 통과한 구원

계시록 15:2~ 3
구원받은 자들이 즐거워하며 노래하며 유리바다 위에 서서~~
두 종류의 노래를 부른다.

홍해의 강변에서 불렀던 모세의 노래와(홍해를 통과하여 인도함)
어린양의 노래(침례의 바다를 통과시키셨음)이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은 우리를 심판으로부터 구원할 뿐 아니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악한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물에 의한 심판과 불에 의한 심판 두 종류가 있다.
노아홍수 이후에는 물이 아닌 불로 심판하신다(민11:1, 16:35, 단7:11,게14:10). 하나님의 불은 온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유리 바다 안으로 쓸어 넣을 것이다.
이 유리 바다는 결국 불 못이 될 것이다(계 20:14).

계15:2~3절은 구원받은 자들이 즐거워하고 노래하며 유리바다 위에 서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심판이 수정과 같이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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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28

노아의 방주에서 3과 5라는 기본 숫자는 이 건축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임을 상징하며, 방주전체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방주에는 하늘을 향한 채광을 위한 창문이 하나 있었다.
하나님의 경륜과, 교회 안에는 오직 하나의 창문뿐이어야 한다.
빛은 동서남북에서 와서는 안 되며 오직 하늘 즉 한 창문, 한 계시, 한 이상만 있어야 한다.

방주에는 옆으로 난 한 개의 문 즉 들어가는 문, 통로는 하나뿐이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우리 모두는 동일한 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 문은 그리스도이다.

*방주는 잣나무(진액이 풍족한)로 만들어 졌는데 홍수의 공격을 이길수 있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사망의 홍수도 그분을 파괴할 수 없었다.

*방주 안팎에 역청을 칠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방주는 통나무배가 아닌 잘 짜맞추어진 많은 조각들로 만들어졌다.

방주는 건축이다.
우리는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우리는 더 전진되고 더 높은 구원의 방주를 짓기 위해 일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고, 또 한면으로 우리는 방주를 짓는다!

교회는 단체적인 그리스도이며(고전 12:12), 오늘날의 방주이다.
우리는 지금 구원의 방주를 짓고 있다.

과거에 우리가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교회생활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그러진 세상으로부터 분별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 생활을 함으로써 어그러진 시대에 속한 모든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방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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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27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진과 같다.
창세기 6장에서 사람이 악해졌고 극도로 부패했음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
소망이 없는 것 같다.
인간 타락의 밑바닥에 항상 "그러나" 가 있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생활은 시대를 바꾼 생활이었다.

하나님은 타락한 백성들을 이 세대에서 구출하고 새 시대를 시작하기 위한 "방주"를 필요로 하신다.

합당한 교회생활은 오늘날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방주이다.
이 세대를 끝내고 왕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도록 우리는 오늘날의 노아가 되어서 이 "방주"를 지어야 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의 필요를 계시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시대의 타락한 상황을 보여주셨고, 그분의 의도를 계시하셨다.

그 당시 인류는 가리워졌고 마취되었으며, 모든 정욕과 쾌락에 빠져 있었다.
오늘날 현시대도 마찬가지이다.
타락한 기독교는 이 시대의 조류에 마취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방주에 대한 계시가 필요하다.

주 예수님은 재림 전에도 방주가 필요하시다. 오늘날의 방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이다.
합당한 교회생활은 오늘날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방주이다.

사람들은 왜 우리를 비판하고 반대하는가?
그것은 교회가 어둠의 왕국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교회 생활을 강조하자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다.
나는 오늘날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것이 거룩한 교회생활임을 확신한다.
우리가 오늘날의 노아가 되려면 노아처럼 분별된 생활을 하고 방주를 건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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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26

노아는 은혜를 입었으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다.

노아는 분명히 아담, 아벨, 에노스, 에녹의 경건한 생활에 관해 들음으로써, 생명의 노선을 강하게 연장하기 위하여 일어섰으며, 조상으로부터 모든 경건한 것들을 배웠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혼잡한 세대, 아무도 유혹을 이길 수 없는 세대 안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강하게 하시고, 함께 서시고, 부축하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노아의 힘이요 능력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마음을 노아에게 열어 주셨으며, 비밀을 계시해 주셨다.
노아는 계시를 받음으로써 방주를 지었다!

창세기를 기록한 주된 목적은 타락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마나 많은 은혜가 타락한 사람들에게 임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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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25


<사람의 타락>
첫번째 타락시에 사람은 자신의 영을 사용하지 않았다.

두번째 타락시에 가인은 자신의 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혼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종교를 창시했다.

세번째 타락에서 사람은 타락된 몸을 남용하여 육체가 되었다.
(악한 영과 인성의 혼합)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분의 종 노아에게 전 세대를 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벨이 스스로 선할 수 있었는가?
에녹이 스스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는가?

창세기 5장에 언급된 사랑스런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도움을 받았고 강화되었고 움직여졌다!

만일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서 거두어 들인다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할 것인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벨이나 에녹이 스스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지 말라!
이들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도움을 받았고 강화되었고 움직여졌다.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도울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육체가 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서 떠난 후에 끔직한 홍수의 심판이 임했다.

주 예수님은 현시대를 세 번째 타락인 노아의 때로 비유하셨다(마 24:37-39).
주님은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으며 홍수가 와서 그들을 다 멸했다고 말씀하셨다.
노아시대 사람들이 홍수의 심판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상황도 너무나 똑같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심판이 없는 것처럼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층천의 보좌에서 이 땅의 모든 상할을 보고 계신다.
어느 날 그분은 갑자기 나타나실 것이며 전세계적으로 육체가 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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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24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제 삼대(에노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사람의 타락의 최종 결과에서 벗어나는 길은 제 칠대 곧 에녹에 의해 발견되었다.
주님이 에녹을 데려가시기 전 그가 땅에서 살고 행할 때 사망은 그를 죽이는 역사를 멈추었다.

에녹은 최초로 휴거된 사람이었다.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셨다.

휴거되기를 기대하는가?
주의 이름을 불러야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생명이 성숙해야 한다.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자신의 관념과 갈망에 따라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 없이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며, 그분을 우리의 중심과 모든 것으로 취하는 것이며,
주님의 계시와 인도를 따라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오르막길로 행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가?
언제든지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면 그것은 우리가 내리막 길을 걷고 있음을 뜻한다.
에녹처럼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동행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만일 기꺼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분과 동행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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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M 2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님을 접촉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수천년 전에, 심지어 인류의 제 삼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과 깨지기 쉬움과 죽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부르짖다, 호소하다, 외치다를 뜻한다.
부르짖음은 가장 좋은 영적인 호흡이며, 거룩한 호흡이며, 거룩하게 되는 길이다!!

아나니아가 사울(다메섹)에게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침례를 받고 '주의 이름을 불러'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창세기 4장 26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부르지 않고 그들과 심히 친근하신 분, 그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분을 불렀다.

여호와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이다.
부서지기 쉽고 죽어야 할 운명임을 깨달을 때 사람들은 영존하시는 분인 여호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름이다.
심지어 이 부름은 인류의 제 삼세대부터 시작되었다.

아멘,
주 예수님,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창세기 M 22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심판하거나 사형 선고를 집행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관대하고 자비로운 방법으로 오셨다.

하나님이 동생 아벨이 어디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대답은 인류 역사상 첫번째 거짓말인 큰 거짓말이며,
이것은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거짓말이었다.

가인은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 항상 두려워했다.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그러나 가인은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자신의 길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떠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거처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가인은 그의 공급, 기쁨, 보호인 하나님을 잃고, 자기 보호를 위한 에녹성을 쌓았다.
가인은 최초의 성 건축자였다.
가인은 먼저 종교를 고안했고 다음으로 성을 건축했다.
성건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 문화가 창안한 네 가지 항목,
곧 생존을 위한 성,
생계를 위해 육축 치는 일, 오락을 위한 음악,
방어를 위한 무기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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